아레나와 그라치아의 전 편집장이던 안성현님께서 잡지의 에디터스 레터를 모아 책을 내셨다.

제목은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나일론 시절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며, 아레나+나일론 총괄 본부장으로 모신 인연이 있기도 하다.

(사진은 실제 인물과 살짝 관련이 있습니다;;;)

잡지사에 만 4년을 근무하고도, 단 한번도 에디터스 레터에 관심을 갖거나 그것이 쓰여지는 과정을 지켜본 적이 없다.

단순히 형식적인 인사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해당 월호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서론이랄까. 

새로운 시각에 대한 신선함과, 그 짧은 글들에 담긴 치열함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미안함이 든다.


안성현 편집장에 대한 인터뷰가 아레나에 실렸다. 

http://www.smlounge.co.kr/arena/article/37155

어느 업계의, 그리고 전문가의 뒷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본인의 지휘 아래 수석으로 있던 현 편집장에게서 인터뷰를 받는 전 편집장의 기분은 어떨까.

대견함과 아쉬움과,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올라오는 지적에 대한 통제가 공존하지 않을까.


인터뷰어는 "지금 매거진 업계는 폭풍 전야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내가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다.

박지호 편집장 개인의 의견에 토를 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저 말이 매거진 업계가 갖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한 안일한 시각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개인에 국한된 문제라면 낫지. 박 편집장은 나와 동갑으로, 디지털도 모르는 꼰대라기에는 아직 너무 젊으며 목에 힘 딱 세우는 1군 라이선스 잡지에서만 근무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니 다른 선배 편집장들은 어떨까.


매거진 업계는 폭풍 전야가 아니다. 이미 소생이 가능한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접어든지 오래다.

컴퓨터 매거진이 일이십만부를 팔던 90년대 후반의 정점을 지나, 정확히 1/10으로 그 시장 규모가 줄어들때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야 10년이다. 

그 가파른 하강의 그래프에서 두번의 두드러진 변곡점이 보이는데, 다음 카페와 네이버 블로그의 활성화 시기와 일치한다.

매거진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더 이상 잡지에서만 제공하지는 않게 된 것이며, 패션과 뷰티의 정보가 멋진 글과 사진이 아닌 단순히 정보 자체로만 그 가치를 부여받는다. 화장법을 배우기 위해 매거진을 뒤져보는게 아니라, 핸드폰으로 똑딱똑딱 찍은 블로그 글로도 충분하게 되었다. 정보가 "소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절대 다시 되돌리지 못한다. 블로그와 페이스북에 지친 사람들을 또 다른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지 다시 매거진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기간동안 매거진 업계는 고고한 학처럼 "우리는 종이 잡지를 팔아(정확히는 광고를 팔아) 돈을 버는 것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소셜이 가파르게 날개를 펼치던 때에도 매거진 업계는 굳세게 저항했다. 누군가 디지털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도 "누가 성공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실패하는가"를 더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들처럼.


지금 너도나도 디지털로 달려들었지만, 여전히 디지털적 생리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러니 라이크팜을 사서 팬 수를 뻥튀기 하는데에만 열중하지. 디지털을 단순히 확장된 접점으로만 생각한다면, 미래는 없다.

관련 글 - 잡지사 페이스북은 실제로 광고 가치가 있는가


후지필름은 생사의 기로에서 화장품 사업을 통해 전환점을 마련했다. 생뚱맞아 보이지만, 후지는 필름과 화장품 제조의 원천 노하우가 동일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후지가 스스로를 "필름 만드는 회사"라고 정의했다면 불가능했을 행보다. 

아마존 역시 그들의 핵심 역량을 책장사라고 보지 않았다.


Value Proposition. 제대로 전략을 배운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단어다. 그냥 멋진 슬로건이 아니라 가장 본질이 되는 서비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

잡지사의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무엇일까.

페이퍼 매거진을 만드는 곳?

브랜드와 고객의 허브?

컨텐츠를 생산하는 곳?


미디어 블링이라는 회사가 있다, 블링이라는 잡지를 만드는 곳이다.

블링은 브랜드를 대상으로 블로그 운영을 포함한 디지털 컨텐츠 사업을 몇년 전 시작했다. 매거진 업계 내에서는 많은 비아냥을 받고 있고(격 떨어진다고), 디지털 전문성에 대해서도 인정할만한 수준이 못된다.

한달에 천단위의 돈을 받는데 하루 수십명의 방문자를 갖는 디지털 플랫폼이 도대체 무슨 생명력이 있담. 블링이 대행하는 컨텐츠는 "디지털화" 되었다기보다는 매거진의 생리 그대로, 단순히 디지털에 올려질 뿐이라는 느낌이다. 성과측정은 거의 초급 수준이다 못해 없다고 봐야 하는게 맞고.

그러나 블링은 스스로를 "컨텐츠 생산자"로 정의내린, 거의 첫번째 국내 매거진이 아닐까 싶다. 그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항상은 아니지만 간헐적인 관심과 응원을 보낸다.


블링만이 정답은 아니다.

허브라는 존재로서 가능한 일은 무궁무진하며, 이미 일부 매거진은 낮은 수준이나마 관련 사업으로의 확장을 하고 있다. 아직 큰 사업화로의 단계는 아니지만 베스트베이비의 아이사랑캠프는 오픈 10분만에 티겟이 매진되며, 더북컴퍼니의 커뮤니티 개더링 서비스도 작은 규모지만 알차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컨텐츠 생산자로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반 바이럴 대행사는 흉내도 못내는 컨텐츠 능력을 가진 매거진 회사가 디지털적 전문성과 생리까지 갖출 때, 현재의 바이럴 대행사들은 아마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정의내리느냐다. 


대행사에서 또는 직원으로 다양한 업계를 경험했다. 호텔, 학원, 화장품, 항공사, F&B, 관공서 등등.

그 중 매거진 업계만큼 내부 마인드가 닫힌 곳은 보기 힘들다. 그 보수적이라는 호텔도, 관공서도 조직 유연성의 한계가 있을지언정 내부 구성원의 마인드 문제는 크지 않다.

"마인드만 바꾸면 된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게 제일 어렵다. 어느 회사에 속한다는 것이 단순이 자신의 커리어의 일부일 뿐이라는, 그래서 조직의 충성도가 비교적 낮은 에디터들이 다수인 것도 큰 장벽이다. 비록 회사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해도 "굳이 내가 왜?"라는 생각을 가진 구성원이 상당수 있다. 아 진짜 개인적으로도 쳐죽여 마땅한 경험들이 있지만... 생략.

혁신의 시각 역시 매우 협소하다. 매거진이 미래를 눈여겨 볼 것은 어떤 매거진이 변화에 성공했는가가 아니다. 참고할만한 매거진이라고 해봐야 전세계에서 도대체 몇종인가? 심지어 자신들보다 작은 규모의 매거진은 아무리 성공해도 애써 폄훼하는 정서를 가진 동네인데. 후지, 아마존, 애플 등등이 과연 어떤 기준과 방식으로 변화하고 확장하며 성장했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보험업계 웹사이트가 호텔부킹 사이트를 따라하듯, 혁신 첫걸음은 동종이 아닌 이종에서 찾아야 한다.


비록 경영진의 뻘짓으로 와르르 무너졌지만, 매거진 업계의 디지털 테스트를 선도하던 엘르가, 엘르를 늘 바로 발뒤꿈치에서 따라붙던 중앙으로 인수되었다. 중소규모 독립 매거진은 그 유연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위기는 충분하고, 판은 무르익어간다. 

과연 누가 Paradigm Shift를 가져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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